마흔한 살에 결혼 (49화)
  제7장 넓은 세상 이야기

26세에 해병소위로 임관하고 나서 만 3년의 의무복무기간이 무기한 연기되더니, 만 5년 1개월이 지나서야 31살 나이에 해병 대위로 예편하게 되었다.

인생에서 가장 왕성하고 활력이 넘쳐나야 할 황금기를 국토의 보존 및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헌신한 셈이다. 그간 엄청난 훈련을 통하여 임관하였고 더욱이 월남전에 소총소대장으로 참전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순간을 맛보기도 했다. 초급장교로서 온갖 훈련과 작전을 다 수행하고서 옷을 벗게 되었다.

그간 학창시절에 친하게 지내왔던 여자친구들은 5년간의 군대생활을 하는 동안에 하나둘 시집가더니 제대할 무렵에는 시집 못간 친구는 하나도 없게 되었다. 막상 제대하거서도 결혼을 엄두도 못 냈다. 28세에 월남전에서 막 돌아오고 나서 석 달이 지날 무렵에 선친께서 세상을 버리게 되니, 나는 칠남매의 장남으로서 할머니와 어머니 등 대가족의 가장이 되고 만 것이다. 어린 동생들 뒷바라지에다 내 학업마저 남아 있으니 앞날이 암담하기만 했다.

군복무는 마쳤으니, 대학원을 마치면 미국으로 유할 갈 계획을 한 것도 어렵게 되었다. 우선 가족의 생계와 동생들 학비가 문제였다.

해병대 장교로 입대하기 전에 1년간 근무하였던 상명여자고등학교에, 제대하고 몇 달이 지난 후에 복직하게 되어 교직생활은 어렵게 되었다. 외국유학이 어렵게 되던 중에 중앙일보사 개발부에 입사하여 식물원 조성에도 참여하였다.

우연치 않게 해병대 동기생 강인회의 권유로 35세에 동국대학교 대학원 임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게 되었다. 나는 여지껏 등록금이 비싼 사립하교라고는 몰랐다. 더욱이 국내대학에서 박사과정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안 꾸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이야 어찌하랴.

중앙일보 개발부에 근무하면서 용인자연농원(現, 에버랜드) 장미원에 장미 4,500주 식재계획과 식재공사를 5월 말일까지 끝내주고 6월 5일 부로 사표를 내거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학생이 되었다. 이왕 공부하려면 직업 없이 순수한 학생이 되어 충분히 공부하고 싶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대학이다”라고 영국의 어느 시인은 말했다.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학생이 되니 무척 기뻤다. 아침 9시에 학교에 나와서 11시가 되어서야 늦게 나오면 하루가 보람찼다.

박사과정 2년차에 상명여자대학에 처음 출강하게 되니 교수님 소리를 듣는 것도 즐거운 일이어서 정말 교수가 된 듯 싶었다. 이니 36살의 늦깎이 총각이 되었고, 결혼할 처지는 못 되지만 여기저기 선보라고 하여 마지못해 나가보면, 신랑감은 좋으나 무얼 먹고 살아가느냐고 묻는 게 예사였다. 아닌 게 아니라 사실이 그러했다.

40살에 상지대학교 병설 전문대학 조경과에 조교수로 임명을 받고 보니 날아갈 듯 기뻤다. 비로소 대학교수가 된 것이다. 이제야 살아갈 자신이 생겼고, 결혼할 처지도 되었다. 나는 중매결혼을 하였다. 나의 집사람은 이화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교육부 편수관실에서 근무하다가 한국교육개발원이 생기면서 국어연구실에서 근무하였다.
 
▲ 상지전문대학교 교수시절, 조경학과 제자들과

편수관실에서는 집안의 친척 되시는 최영복 편수관(전 창덕여중 교장) 밑에서 일했었고, 교육개발원에서는 교육부 편수관으로 계시다가 옮겨오신 곽상만 선생님이 계셨는데, 이 분은 교육부에서 농업교육담당관이시고 또한 상명여고 학부형이었던 관계로 잘 아는 분이었는데, 곽 선생님 중매로 결혼이 이루어졌다. 광화문 서린호텔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첫 모습에 괜찮다는 인상을 받았다.

선보기에서 바로 결혼할 것은 아니고 한참 후에 내가 교수가 되고서야 결혼식을 하였다. 마흔한 살이던 9월 5일, 계속되던 장마가 활짝 개고 푸르고 맑은 날, 세종기념관에서 친구와 친척들의 축하를 받으며 늦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장에서 신랑 입장할 때 저고리 윗주머니에 꽂은 소국(小菊)의 달콤한 향기는 코끝을 자극하여 기분이 매우 좋았다.

시골의 어느 친척은 내가 장가갈 때 입으라고 명주 한 필을 손수 짜서 깊이 간직해두셨는데, 늦게 장가가는 바람에 손주도 결혼도 못 보시고 세상을 뜨시고 말았다.

박사과정 3년 동안 생돈으로 공부하느라고 집 한 채가 다 날아가고, 정작 결혼할 때에는 주공 독신자 아파트 7.5평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다. 2년쯤 지나서 과천 신도시에 25평 주공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를 가게 되었고, 동시에 동국대학교 조경학과 교수가 되어 행운이 겹치게 되었고, 9월 첫 딸 재희를 얻게 되어 1983년에는 행운이 셋씩이나 겹치는 해가 되었다. 늦게 본 자식이라 귀엽기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딸 재희(哉熙)는 눈망울이 크고 애기 때부터 영리하여 보았다. 다시 1년이 지나서 44세에 아들 충희(忠熙)를 보았다. 재희 출산 시에는 강의 중이라 병원에 못 가보았지만 아들 출산은 주말이어서 병원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간호사가 보호자를 부르더니 아들입니다 말하며 보여주는데 무척 기뻤다. 수술실에서 산모에게는 신생아를 안고서 나오며 담당의시가 무엇이 달렸냐고만 말해서 긴장했었다고 한다.

딸 재희는 딸 아이라 햇솜 같았는데, 아들 충희는 신생아 때부터 뼈가 장작개비같이 뻣뻣하여 딸과는 완연이 구분되었고 울지도 않고 소화도 잘 시키며 건강하게 자라주었다. 얼굴도 희고 잘 생겨서 파출부 아줌마는 아침에 오자마자 충희를 업고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노인정에 가서 애기자랑을 하고 다닐 만큼 인물이 준수하였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4학년과 3학년이 될 무렵 나는 자연과학대장 임기 3년을 마치고 연구년을 신청하며 서둘러서 미국으로 교환교수로 나갔다. 내가 못한 유학이어서만 아니라 아이들 영어교육을 위해서였다.

행운은 다시 찾아와 분당 신도시에 48평 아파트를 분양받게 되어 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분당 새집에서 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느새 재희는 서현고등학교 졸업반이 되어 대학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서 TOEFL 650점을 따냈고 SATI는 1600점 만점에 1460점을 받았다. 또한 시사영어사 주최 영어경시대회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아들 충희는 휘문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는데, TOEFL성적 590점을 받았고, 시사영어사 주최 영어경시대회에서는 동상을 받았다. 내년쯤에는 더 높은 성적이 예상된다.

남매는 연년생이라 서로 도와주며 잘 지낸다. 과천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엄마가 직장에 출근하느라고 아이들 뒷바라지를 못해주는 것을 저희들은 이해하여, 재희는 웅변원고를 써주고 충희는 웅변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아오고서야 알게 된 일이 있었다. 저희들끼리 도와가며 일 해나가는 것들이 대견스러웠다.

나는 어느덧 세월이 흘러 환갑을 맞이하게 되었고, 아이들은 아직 고등학생으로 어린데, 이 풍진 세상을 잘 헤쳐 나가주길 바랄 뿐이다.

 
  대학교수가 되다 (48화)
  동국대 경주캠퍼스 (50화)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