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사례를 들어본다. 여직원을 한 명 채용하려고 견습생으로 선발했을 뿐 아직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기도 전인데 벌써 노조에 가입토록 하고 노조에 동조해야 한다는 등 불법적인 소란을 일으켜 결국 그 여직원의 채용을 보류하게 되자 노조 측은 이유 불문하고 반말을 하는 등 그야말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종의 만행을 일삼는 것으로 당시 노사 간 갈등의 골이 깊어만 갔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참아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식들도 신용금고를 꼭 지켜야 하겠다는 의욕마저 상실한 데다 당시 내 나이 고희를 바라보는 시점에 있었기 때문에 남은 여생이나마 여유 있고 평안하게 지내보자는 심정에서 결국 신용금고를 타인에게 양도하는 쪽으로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1989년 12월 말일을 기해 금강제화 그룹에 영업권을 이양하고 17년간 애지중지 키워 오던 회사를 물러났던 것이다.
하루아침에 양도를 하고 물러난다는 것은 그리 평안한 심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회사를 빼앗긴 것도 아니고 경영에 실패한 것도 아니다. 나로서는 정정당당하게 당시로서는 그런대로 최고의 영업권을 받고 양도한 것이어서 추호의 부끄럼 없는 처사라고 자부하면서 금융업에 대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나는 본래부터 정치를 싫어했고 또 외면해 왔다. 그러기에 교육자의 길을 걸어왔고 이제는 사업의 길을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연한 일로 정치판에 말려들어 수개월 간이나마 곤욕을 치른 일이 있다.
금고가 처음에는 할부금고로 시작하여 여신만을 해 왔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세가 확장되고 안국동으로 이전해 와서는 수신업무가 인가되어 이제는 점포의 모습이나 위치 등이 고객 위주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안국동의 3층에서 여신만 하는 점포의 모습으로는 더 이상 발전할 수가 없다.
따라서 중구 삼각동 금융가 중심 요지에 금융회사다운 제 모습을 갖춘 점포를 시설하고 이제 막 이전을 하기 위해 이전 안내장까지도 마련해 놓은 사태에서 이전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는 때였다. 그런데 신용금고 연합회에서 당시 우리 금고의 대표이사로 되어 있는 남기중 사장을 의논할 사항이 있으니 잠시 들어와 달라는 연락이 왔다.
신용금고의 감독체제가 물론 재무부 제2과 소관으로 되어 있으나 그 몇 명 안 되는 직원으로 신용금고의 전반적인 지도 감독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신용금고 연합회를 조직하게 하고 그 연합회로 하여금 전국 300여 신용금고를 관리하도록 하고 주요 업무사항 등만을 관장하는 체제였다.
신용금고 연합회장 말에 의하면 이유는 묻지 말고 무조건 우리의 점포이전 계획을 당분간 유보해 달라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이야기고 청천벽력 같은 요구사항이었다. 이 말을 들은 남 사장은 회사로 돌아와 회장 겸 경영주인 나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유는 첫째로 대내외적으로나 고객에 대한 공신력문제이고 둘째는 이미 얻어 놓은 점포의 임대료이며 그에 부수되는 여러 가지 금전적인 손해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마디로 나는 아무리 상부기관의 요청이라 할지라도 불가라는 말을 전하도록 했다.
신용금고는 물론 재무부의 인가를 얻어 정부의 지도 보호 하에서 영업을 한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영업지도방침과는 별개문제인 개인재산, 개인의 권리침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3일 후 이번에는 남 사장을 다시 부를 뿐만 아니라 남 사장으로 하여금 나를 연합회로 잠깐 들어와 달라는 연락이 온 것이다. 나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그 이유라도 알아본다는 생각에서 연합회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엉뚱하게도 정치문제가 개재되어 있는 것이었다. 안국동 우리 신용금고 점포 바로 옆에 당시 민정당 관훈동 당사가 있었다. 우리가 이사를 간다는 소문을 듣고 당시 야당인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에서 어떤 개인의 명의로 우리 점포를 임대계약을 한 것을 정부 모 기관에서 탐지하고 만일 민추협이 그 자리에 들어오면 민정당이 여러모로 불리하다는 이유로 민추협을 그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 점포의 이전을 유보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나의 입장은 참으로 난처했다. 정부가 하는 일에 협조를 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의 입장만 생각해서 예정대로 점포를 이전한다는 것도 문제가 있기 때문에 당분간만이라도 사태를 보아가며 처신한다는 생각에서 점포이전을 얼마동안 유보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민추협 측에서 그 낌새를 탐지하고 우리에게 왜 이전한다는 날짜가 되었는데 이전을 안 하느냐는 등 우리를 위협을 하며 영업을 못하게까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과 직접 부딪치는 것을 피하여 인근 다방에 임시 연락처를 정하고 전화로 업무지시와 중요한 보고를 받는 사태까지 사건은 확대되었다.
한편 보도기관에서도 이 사실을 보도하여 사태는 더욱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심지어는 며칠간 점포 문을 닫는 사태까지 일어났던 것이다. 우리 속담에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라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 같다.
수일 후 영업은 복귀되었지만 결국 예정보다 약 3개월 후 점포를 이전하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피해보상이라고나 할까 모 은행에서 약 10억 원 정도의 수신금융을 지원받는 것으로 위로를 받으며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