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칡넝쿨> 문학 동인회 (13회)
  제2장 아름다운 삶을 누리자

그 당시 고등학생들이 백일장이 전국 곳곳에서 개최되었는데, 장원을 도맡아 놓고 하는 친구가 서영수였다. <학원>지의 현상모집에서 <별>이라는 시로 제2회 <학원문학상> 우수작으로 당선되었고, 곧이어 <학원>지에 입선한 <야학>이라는 작품과 합해서 <별과 야학>이라는 2인 학생시집을 간행하여 1957년 가을, 그 당시 문단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12월 하순경 문화예식장에서 개최된 <별과 야학>의 출판기념회에서는 내가 우인 대표로 축사를 하였다.

김원중은 처음부터 칡넝쿨 총무를 맡아 동인회의 모든 일을 주도했다.

민경철은 1964년 <과실 속의 아가씨;>라는 제목으로 김원중과 2인 시집을 낸바 있다. 그는 시를 쓰고 외우는 재능이 뛰어났다. 그러나 역시 재능만으로 성공하기 어려운가보다. 민경철에게 좋은 환경이 주어졌더라면 아마 우리 문단에 크게 공헌할 작품을 남겼을, 그만큼 천성적인 시재를 지니고 있는 친구이다.

정영선은 신명여고 시절부터 그야말로 주옥같은 서정시를 썼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독서광이었다. 그는 서울대학교 유달영(柳達永) 교수의 <인생노트>를 읽고 감명을 받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진학하였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에도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사가 제정한 문학상에 시가 당선되기도 하였다. 대학 졸업 후 여성 월간지 <여원> 기자로 활동하다가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조경학을 전공, 이 분야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국 여성 중 유일한 조경기술자로서 청주대학 교수도 지내면서 속리산 국립공원 등 우리나라 명소의 조경사업에 많이 참여하였다. 지금은 한국 제일의 조경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아마 계속 시를 썼더라면 지금쯤 우리나라의 독보적인 여류시인이 되었을 것이다.

계송고등학교에서 활발히 문예활동을 하던 조주환은 뒤늦게 우리 <칡넝쿨> 문학동인회에 합류했다. 그가 경북대학교 철학과를 택한 것은 순전히 문학을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대학 진학 후 시작활동이 뜸해지기 시작하였고, 대학원 진학 이후로는 학문에만 몰두했다. 하이데거 철학에 심취했던 조주환은 지금은 철학박사가 되어 지금은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박양균 선생이 학생들이 작품을 일일이 수정해주시면서, 우리 <칡넝쿨> 동인들에게 특히 강조한 것은 문학적인 것보다 인간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었다. 문학하는 사람도 머리 깎고 동회비 잘 내고 사회 규범 잘 지킨 다음 문학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술집에서 하는 문학, 또 문학을 한다는 핑계로 사회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예사로 하는 것 따위는 용납하시지 않으셨다. 심지어 어느 시인의 이름까지 대고 그런 류의 시인은 닮지 말고 인사하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면 마음에 드는 사람만 상대하는 그런 분인 것 같지만 사실은 폭이 넓은 선생님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칡넝쿨> 문학 동인회에 참여하면서 제1집에는 <3월을 안고>, 제2집에는 <봄소식>, 제3집에는 <바다>, <꽃밭>, <그것은 나의 조국이었다>, <자화상> 등을 발표하였다. <자화상>은 <영남일보>에 <칡넝쿨> 문학동인회 이름으로 발표를 했다.

이처럼 <칡넝쿨>은 고등학교 시절 내 생활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 당시 내가 거주하고 있었던 작은누나 집은 신천동에 있었는데, 김원중은 하교하는 길에 늘 우리 집에 들렀다. 김원중과 나는 거의 매일 만나서 국화빵 집에 들어가서 국화빵 몇 개씩을 먹고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밤이 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했다. 때로는 통행금지 시간을 넘게 되어 곤욕을 치른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 어느날의 <칡넝굴> 문학동인회 회원들

일요일이 되면 우리 두 사람은 장두성의 집이나 민경철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고, 이따금 이상홍, 김원중, 박곤걸, 장윤익, 장두성 등이 달성공원에 있는 이상화 시비(詩碑) 앞에서 시 백일장을 하거나 경북대학교와 대구대학 도서관에서 가서 온종일 책을 읽으며 지내기도 했다.

1957년 1월 중순경 대구 미국공보원 전시실에서 <칡넝쿨> 문학동인회의 시화전이 있었다. 많은 대구 시민들이 관람했고, 대구의 일간신문들도 고등학생들의 시화전을 크게 다루어주었다.

시화전이 끝나고 자축의 시간을 가진 후 집 방향이 같은 나와 김원중, 서영수, 김원자는 앙키시장(국제시장)을 거쳐 시청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서영수, 나, 김원중이 열심히 이야기하면서 걸었고, 김원자는 좀 뒤쳐져서 따라왔다.
 
그 무렵 양키시장에는 강패들이 많았다. 양키시장 중간 쯤 걷고 있었는데, 김원자가 보이지 않았다. 뒤쪽을 자세히 살펴보니 같은 유니폼을 입은 깡패 세 명이 여학생을 이리 막고 저리 막으며 가는 길을 방해하고 있었다.

화가 나서 내가 “이 새끼”라고 고함치며 내가 그 중의 한명의 턱을 갈기자 나와 세 사람 깡패들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었다. 처음은 내 쪽이 유리했으나 같은 유니폼이 하나 둘씩 불어나 다섯 명이 넘는 것처럼 느껴졌다. 김원중과 서영수는 이런 일을 처음 당하기 때문에 근처에서 싸움구경을 하며 마음만 졸이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것 큰일 났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서 나는 공갈을 쳤다. 바지 포켓에 손을 넣으며,
“먼저 덤비는 놈은 칼로 배를 갈라 죽여버리겠다!”
“오늘 몇 사람 죽을 각오를 해라!”
하고 공갈을 치니 선뜻 덤비지는 못하고 그들도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돌인지 눈 뭉치인지 모르나 무엇을 쥐는 것 같아서 나는 송죽극장 쪽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내 뒤를 따라 우루루 달려왔으나 나를 붙잡지 못하고 싸움이 처음 시작된 곳으로 달려갔다.

나는 서영수, 김원중, 김원자가 걱정이 되어 시청 옆 고서점들이 있는 길로 돌아서 아래쪽으로부터 다시 처음 싸움이 시작된 자리로 거슬러 올라갔다. 나와 깡패들이 싸울 때 서영수, 김원중은 여학생을 데리고 피했으면 아무 일이 없을 텐데 싸움 근방에는 아예 가보지 못한 두 사람이 내 걱정을 하면서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다가 그때 일을 당한 것이다.

김원중은 느닷없이 내지른 깡패의 주먹에 얼굴을 맞아서 쓰러졌고, 서영수는 뺨을 두 대나 맞고 도망친 것이다. 내가 거슬러 올라가면서 만난 김원중과 김원자는 거의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자 김원중은 “이가 빠진 것 같다고”고 말했다.

여학생을 집까지 데려다 주고, 김원중의 집으로 가니 김원중의 입술 일부가 떨어져 나가 있었다.

서영수는 우리집에 먼저 와 있었는데 그의 양볼이 엄청나게 부어 있었다. 이튿날 나는 두 사람을 보고 놀랐다. “싸움 한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가만히 구경만 한 사람이 왜 다쳤느냐?”고 했더니 두 사람은 내가 걱정이 되어서 의리상 자리를 뜨지 못했다고 했디다.

<칡넝쿨>동인들은 이렇게 순수한 학생들이었다. 고등학교 때의 <칡넝쿨> 행사는 이러한 서부활극으로 마감되고, 대학시절에 와서도 동인들의 우정은 더 끈끈하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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