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의 옛일을 회상하며
백원기
<인하대학교 법과대학장>
내가 처음 장윤익 선생님을 알게 된지도 벌써 20년이 다 되어간다. 선생님께서는 프랑스의 그레노블에서 2개월간 어학연수를 마치고 1984년 10월에 파리에 오셨으며, 바로 그 무렵 내가 다니던 파리연합교회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당시 우리 교회는 마땅한 건물조차 없어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를 빌려 주일 오후에 예배를 드리고 있었으며, 그해 10월 어느날 주일예배를 마치면서 서울에서 오신 교수님이며 집사님이라고 소개가 있었고, 그때 인사를 드리면서 알게 된 것으로 오래 전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날 예배를 마친 후 선생님께서는 카페에서 드미 비에르나 한잔 하면서 말씀을 나누기를 원하셨고, 당시 선생님께서도 내가 있었던 <국제대학생기숙사>에 머무르고 계셨기 때문에 같이 전철을 타고 가면서 자연스럽게 동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전철에서 내려 낙엽이 뒤덮인 가로수 길을 따라 걸어가며 기숙사부근 한 카페에 들어갔다.
프랑스에서는 맥주 한잔이 우리처럼 500cc가 아니라 250cc이어서 이 한잔을 ‘드미’라고 하는데 이는 절반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원래의 한잔은 ‘놀라운’이라는 뜻을 지닌 ‘포르미다블’이라고 부르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보통 이 ‘드미’한잔을 가지고 두세 시간 창밖을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보니 원래 한 잔인 500cc를 마시는 것은 그들에게는 놀라운 일이 되는 것이다. 무척 재미있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선생님께서 가볍게 한잔 하자는 것이 한잔이 아니라 여러 잔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선생님께서 다른 사람을 매우 애정을 가지고 대하신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이해심이 많다는 점도 알게 되어 편안하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술잔을 비우게 된 것으로 기억난다.
그날 이후 선생님께서 당시 같이 어학연수를 하였던, 유학생들을 소개시켜주셨고, 그들 중에 고인이 된 김학정 씨(당시 정부 경제기획원 사무관) 안세영 사무관(현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 등과 같은 행정공무원들과 임채완 교수(현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송문영 교수(전 수원대 법정대 학장)도 있었다.
당시 나는 파리 제2대학교 법과대학원에서 ‘법조실무를 위한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었는데,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 고생을 많이 하고 있었으며, 그 어려울 때 선생님을 알게 되어 개인적으로 많은 격려와 위로를 받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밤늦게까지 공부한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도 선생님은 자신의 근본적인 신앙을 지키면서도(사실 기독교 신앙은 잘못된 경우 독선적인 경향과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질 수도 있는데)다른 사람을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대하는 진솔한 자세를 견지하고 계셨으며, 여러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사랑방(실제로 당시 기숙사의 선생님 방은 고민 많은 사람들이 모여 토론하는 화기애애한 방이었다)의 방장과 같은 인화력과 포용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떤 객관적 판단과 결정이 요구되는 사안에 대하여는 냉철한 이성의 발동을 요구되는 사안에 대하여는 냉철한 이성의 발동을 요구하면서 내가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할 경우, “백 선생은 너무 낭만적인데......” 하시면서 조언을 해주셨다.
이에 대하여 나는 “저 원래 낭만적인 사람입니다. 불문학을 전공했어야 하는데요.” 라고 하며 웃음을 나누었던 기억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더욱이 선생님은 다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예리하게 판단하시고, 그 사람의 장점은 최대한 살리고, 그 단점을 최소화시켜 그 사람을 좋은 관계로 유지하며 발전시키는 커다란 덕을 가지고 게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러한 점이 선생님의 큰 장점이라면 이와는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싫은 말을 절대로 직선적으로 못하시는 것이 굳이 단점으로 찾으라면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당시 나는 한국유학생회 부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시대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후 서슬이 시퍼런 군사정권 시절이며, 그 회장이 나중에 알고 보니 육사출신 서울대 위탁교육생이었던 박사과정 유학생이어서 도매금으로 나까지 안기부와 관련된 사람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때 선생님께서 억울한 오해를 받아 울분에 차 있었던 나를 믿어주시고 나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으며, 싸우기까지 하였던 원용수 씨(현 숙명여대 법대교수)를 불러 싸움을 말려주시고 화해를 주선해주기까지 하셨다.
나는 이 일을 통하여 선생님이 나를 잘 아시고 나의 장점을 발전시킬 수 있는 깨달음을 주셨음을 알게 되었으며, 선생님을 통하여 이웃과의 평화를 강조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제로 체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1985년 여름에 선생님과 함께 했던 스페인 여행의 추억을 잊을 수 없다. 당시 나는 유학비용이 부족하여 제대로 여행다운 여행 한번 못했었는데, 선생님 덕분에 버스로 하는 매우 고단하고 힘든 여정이기는 했지만 좋은 여행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여행을 통하여 수도인 마드리드에 서 있는 건축물의 웅장함에 놀라고 과거 해상왕국의 위용을 목도할 수 있었으며, 중세 천주교회의 사치스러움의 정도를 넘어선 부패상을 실제로 보고 말로만 들었던 종교개혁의 당위성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또 파리 근교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비롯한 유명한 성을 방문하면서 프랑스 혁명의 숨결을 느끼기도 하였다.
이처럼 힘들었던 유학생활의 일부분이나마 선생님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배우고 느낌 점은 어려운 세상과 현 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물과 같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경험들’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나는 내 인생에서 장윤익 선생님을 만나서 알고 지내게 된 것을 커다란 행복과 기쁨으로 생각한다.
사람의 인생은 어떠한 사람을 만나냐에 따라서 크게 변하게 되며 때로는 행복과 불행의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그 사람을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 만나는가도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나는 선생님을 20년 전 그때 외롭고 힘든 유학지에서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마음속 깊이 감사드린다.
당시 중도에 포기할 수 있었던 유학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된 것도 선생님의 격려와 진심어린 조언 덕분이었고, 선생님이 나를 대하셨듯이 나도 학생들을 대하여 학생들에게 사랑받는 선생님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선생님이 주셨던 충고를 통하여 대학행정과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긍정적인 행정력을 갖추게 되었으니, 어찌 선생님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오늘 장윤익 선생님과 함께 있었던 파리에서의 옛 추억을 회상하면서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기숙사 옆 카페에서 나누었던 대화와 맥주의 맛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오늘 다시 그때의 맥주를 마신다면 밤새도록 끝이 없이 마실 것 같다. 또 실제로 그렇게 마시고 싶다. 아마도 독일학생들보다 더 많이 맥주를 마셨던 당시 한국유학생들에게 놀란 카페주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게 될 것 같다. 그 주인은 결국 맥주가 동이 나는 바람에 우리들을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