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의 인연 (23)

파리에서의 인연

임채완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바야흐로 가을이다.

연구실 창문 너머로 붉게 물든 캠퍼스는 나에게 지난 추억을 반추하게 한다. 대학 강단에 선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23년의 세월이 흘렀다.

1981년에 전남대학교 전임강사로 발령을 받았던 젊은 시절에는 꿈도 많았고, 앞날의 설계도 거창하였다. 당시 나는 사회과학이론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고, 더욱 깊은 연구를 하기 위하여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처음 연구를 했던 곳은 파리 가톨릭대학교 사회과학부였으며, 박사학위를 받은 곳은 프랑스 파리 제10대학 낭떼르대학(구 소르본느대학)이었다.

내가 처음 파리 유학생활에서 우연하게 만났던 분이 현재 경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재직하고 있는 장윤익 교수님이었다.

인간의 만남은 이미 예정되어 있거나 또는 우연하게 이루어지는 경우든 간에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계기가 된다. 장윤익 교수님과 나와의 만남 역시 나의 파리유학생활에서 많은 의미와 새로운 학문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나는 1984년 초에 프랑스 유학길을 떠났고, 파리에서 최초로 머물렀던 곳이 ‘시떼 유니베르시때르(대학기숙사촌)’의 인도관이었다. 나는 인도관에서 정식 입주자 자격으로 머문 것이 아니라 석 달만 한정적으로 머무르는 빠사제(임시거주지)였다.

외국에 도착해서 유학을 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기숙사 또는 집, 학교등록, 그리고 언어능력이다. 나 역시 장기적으로 거주하면서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숙사나 스튜디오(원룸)가 당장 필요했다.

파리에서 아는 사람이 없었던 나는 주(駐) 프랑스 한국대사관의 교육관과 이 문제를 상의하였다. 교육관이 나에게 소개를 해주었던 분이 바로 장윤익 교수님이었다.


▲ 임채완 교수 [출처 ; 전남대 블로그 전대미인]

장 교수님이 거주하고 있었던 기숙사는 ‘시떼 유니베르시떼르’에 살고 있는 나이 많은 한국유학생들의 사랑방이었다. 우리들은 연구하느라고 바쁜 와중에도 가끔 모여서 한국과 프랑스 유학생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자연히 유학생활이야기를 하다보면 많은 정보들이 서로 교환되었다. 이러한 정보교환의 한 가운데에 있었던 분이 장 교수님이었다.

나 역시 장 교수님과 상의해서 프랑스 파리에서 교환교수를 마치고 6개월 후에 한국으로 떠날 예정인 충남대학교 송재영 학장의 임대아파트를 예약할 수 있었다. 그 아파트는 5층이었는데, 나는 1층에 가족과 함께 살았다. 일층이기 때문에 장미울타리가 있었고, 울타리 안안에는 잔디밭이 있었다. 때가 되면 잔디도 깎아야 하고 장미울타리도 잘라야 했다. 장비가 없는 나에게 대단히 힘든 일이었으나 가족과 함께 좋은 거주환경에서 연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하도록 도와주신 분이 장윤익 교수님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유학생활을 회상할 때마다 장윤익 교수님을 떠올리면서 그 분의 따뜻한 마음을 생각한다.

파리에 살면서 나의 생활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장 교수님과 나는 유렵에서 일본의 위상, 한국의 문화, 유학생들의 삶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이러한 대화에는 주변 기숙사에 살고 있는 늙은 유학생들이 동참을 했으며, 그때 우리는 이야기 하면서 맥주와 사이다를 섞어 만든 ‘드 미 비에르’를 마셨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파리의 ,대학로인 셍미쉘 거리를 걸었고, 그곳에 있는 책방들을 둘러보았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했다. 룩상부르크 공원 옆에 있는 중국집에서 가끔 식사를 하였다. 중국집을 포함한 프랑스 식당에서 식사하는 절차는 전체 요리를 먹고, 주 요리를 시키고, 그리고 후식을 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주 요리만 시켜서 식사를 하였다. 처음에 식사 주문을 맡은 늙은 가르송(웨이터)이 우리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냐하면 전체요리와 후식도 없이 주요리만 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돈이 없으니 주 요리만 시켜도 괜찮겠느냐고 물었고, 그 늙은 가르송이 동의를 해주었다. 그 다음부터 우리가 식사를 주문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아무 갈등 없이 주 요리만 시켜 싼값으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때 가장 맛있게 먹었던 주요리가 볶음밥이었다.

파리에서 1년의 유학생활을 보내고 있던 1985년 봄, 장 교수님과 나는 노르망디에 있는 몽셍 미셀과 셍 마로를 관광하였다. 가는 길에서 처음으로 프랑스 농촌을 차창으로 볼 수 있었다. 나는 이곳의 농촌이 매우 풍요롭고 잘 정돈도어 있다고 생각되었다. 목가적인 삶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가는 길목에 르와르 강변에 있는 오래된 사또(성 ;城)들도 방문하였다. 오랜 역사적 유물들이 잘 보관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중세 봉건 영주들이 그들의 농노에게 행하였던, 고문 장면과 십자군 원정 때 쓰였던 여자들의 다양한 정조대(貞操帶)도 보았다. 여자에 대한 지위가 시대에 따라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이럴 때에 우리의 주요 대학의 관심사는 한국과 프랑스의 역사 및 문화를 비교하는 일이었다. 조선시대 여성과 봉건시대 유럽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차이가 어떠했는가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셍 미쉘과 셍 마로에서 보았던 것은 프랑스가 외침을 당하면서 그들의 역사와 전통을 어떻게 잘 지키고 보존해왔는가 하는 점이다. 이곳을 방문하면서 우리도 한국을 많이 생각하였다.

장 교수님이 귀국한다고 했다. 나는 장 교수님에게 필요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장 교수님은 사양했지만 우리는 사뜨 드 레알에 있는 백화점에 갔다. 나는 가방을 선물하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장 교수님이 내가 선물한 가방을 5년 이상 매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뭉클하였다.

장 교수님이 귀국하는 날은 많은 한국유학생들이 환송을 나왔다. 신태영 감사, 송문영 교수, 김학정 경제기획원 사무관, 안세영 항만청 사무관, 백원기 교수 등 10여명이 드골공항에서 장 교수님을 환송하였다. 김학정 사무관이 “장관이 귀국 할 때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나와 환송한 일이 없습니다.” 농담 아닌 진담을 털어놓았다.

나는 오랜 기간 동안 프랑스 파리에서 머물면서 연구를 계속하였다. 내가 그 당시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파리에 막 도착했을 때 가슴이 따뜻한 장 교수님과의 이연 때문이다. 내가 귀국해서 인천대학교 총장으로 계시는 장 교수님을 딱 한번 뵈었다. 그러다가 최근 장 교수님의 퇴임소식을 들었다.

나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지내던 유학생활에 대한 상념에 잠겼다. 그동안 하는 일 없이 바쁘게 살았고, 무상하게 많은 시간이 빨리도 흘렀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사람의 인연이 누구도 알 수 없는 미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일은 장 교수님에게 간단한 정년퇴임을 축하하는 에세이를 써서 보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