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겐을 곱씹고 싶다
나이가 들면 추억을 되씹으면서 산다. 과거를 곱씹다보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장면들이 떠오른다. 막상 붓을 들고 머릿속에 간직한 그 아름다운 장면을 그리려고 하면 무슨 색을 칠해야할지 막막해진다.
순간 떠오르는 장면과 풍광은 색으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속에는 감정과 느낌이 있고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그때의 감정을 떠올려 보지만,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
1982년 10월 2일, 나는 덴마크 북쪽 올보르 병원에 근무하는 타일의 집에 랄센 교수와 함께 초대받았다. 나를 초대한 랄센 교수는 혈액학을 전공하며 그녀의 아버지가 한국 명예시민증을 받을 정도로 한국을 사랑하는 분인데 국립의료원 초대 신경과 과장으로 부임하여 신경학 계통에 초석을 다지셨다.
덴마크에 도착한 첫날 랄센 교수 집에 머물며 한국 고가구와 병풍, 자개혼수함, 도자기 등 많은 한국 물건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그 당시 을지로 거리에서 동전 몇 푼으로 구매했다는 도자기를 보고 우리의 국보가 이렇게 유출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찔했다.
명주실 다발같이 빛나는 은빛 갈대밭과 바다를 끼고 쏟아지는
햇빛과 자연의 색깔로 무인도 같은 스카겐
노을의 저녁무렵 바다와 하늘이 맞닿아 흐릿한 경계
올보르는 인구가 10,000명인 조그마한 도시이다. 나지막한 붉은 벽돌 사이로 가시나무가 담을 만들고 추운 날씨 탓에 덩굴장미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아기자기한 작은 화분들이 창가를 장식하고 누렇게 물들어가는 잔디가 북유럽이라는 생소한 곳에 온 것을 잠시 잊게 하였다.
그녀의 집은 지은 지 10년이 됐는데 작품사진에 모델이 될 만큼 독특한 디자인의 멋진 집이었다. 집을 사면 20년 동안 국가에 집값을 분할 납부하는데 소위 월부 인생이지만 소유의식보다는 주거의 개념으로 예쁘게 꾸미고 살고 있었다. 추가로 6개월마다 50,000크로나(500만 원)
를 국가에 납부하여야 한다.
또한, 부부가 일한 만큼 1/3은 국가에 세금을 내야 한다. 병원은 무료로 입원 치료가 가능하며 노인들은 국가에서 월 25,000크로나(250만 원)를 지급 받아 생활한다. 젊은 사람들은 애써서 일하려고 하지 않고 더구나 힘든 일은 거부하고 있다.
노인들은 모두 일하는 청장년들이 먹여 살리고 있다. 중환자가 생겨도 진료예약 일을 지키느라 중간에 사망하는 때도 있다고 한다. 지금은 유로화로 세금을 내고 있으며 제도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나는 랄센 교수, 타일과 함께 유트란드 반도의 최첨단에 있는 스카겐으로 발길을 돌렸다. 1982년도 스카겐에는 허허벌판에 달랑 스카겐미술관만 있었다. 식당은 고사하고 커피 한 잔도 마실 곳이 없고 볼거리라고는 스카겐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과 엽서 등 소개된 책자가 전부였다.
요즘도 그때 구입한 안내 책자를 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유트란드 반도의 꼭짓점을 향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길은 없었고 사방이 울창한 나무로 덮여 하늘도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찾은 길은 푹푹 빠지는 진흙 길이었다. 우리는 자동차 바퀴 자국을 만들어가며 조심스럽게 운전해 갔다.
억센 바닷바람에 밀가루같이 보드라운 모래가 군데군데 섬을 이루며 쌓여있고 그 위에 은백색 갈대가 꽃꽂이한 듯 조화롭게 이룬 풍경은 한편의 작품이었다. 그곳을 지나고 나니 두 팔을 힘껏 벌려도, 사방을 둘러보아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대하고 광활한 대서양이 나오지 않는가!
여기서부터 우리는 조심스럽게 모래 발자국을 만들며 한발, 한발 걸어갔다. 도착한 곳은 바로 유트란드 반도의 최첨단 스카겐의 꼭짓점 ‘그레넨’이다. 참으로 황홀하였다. 사람이란 우리뿐이고 오로지 저 멀리 뱃고동 소리, 볼을 아리듯 싸늘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 이따금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 오로지 자연과 한마음이 된 느낌이다. 아무리 긴 호흡을 해도 그곳의 맑은 공기는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나는 지구의 끝자락, 아무도 없는 이 넓은 대서양 한가운데, 바로 덴마크의 땅 끝자락에 서 있었다. 나는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 그대로를 보존하기 위해 철저히 관리하는 덴마크가 부러웠다.
명주실 다발같이 빛나는 은빛 갈대밭과 사시사철 변화무쌍한 바다를 끼고 쏟아지는 햇빛과 찬란한 자연의 색깔로 무인도 같은 스카겐에 유럽의 화가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들 중에는 일생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그림을 그린 이들이 많아 스카겐 박물관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한 화가의 부인은 남편이 하도 그림에만 몰두하기에, 말리다 지쳐 어느새 자신도 스카겐에 매혹되어 남편보다 더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고 한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화가가 페터 세벌린 크로이어(1851-1909)이다.
1840년경부터 1870년대까지 프랑스 회화에 등장한 새로운 조류가 바로 사실주의이다. 퀴스타브 쿠르베의 〈오르낭의 매장〉을 시작으로 장-프랑스아 밀레의 〈이삭줍기〉 등 19세기 중반은 사실주의로 기억되는 시기인데 크로이어의 작품도 섬세하고 빈틈없는 사실주의 화풍이다.
크로이어의 대표작 〈스카겐의 산책〉에는 노을이 있는 저녁 무렵 바다와 하늘이 맞닿아 흐릿한 경계 속에 긴 옷자락을 드리운 두 여인이 해변을 거닐고 있다. 노을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빛과 아직도 남아있는 여분의 빛을 조화롭게 화면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림 속 여인은 크로이어가 사랑하는 아내이고 한 명은 화가인 친구 미카엘의 아내이다. 이들은 모두 화가이다.
지는 해의 잔광을 모래 위를 거닐고 있는 여인의 옷자락에 남겨두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안타깝게도 어머니의 정신병을 물려받아 한동안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 아내와 이혼을 하고 끝내 매독의 후유증으로 화가는 시력을 잃게 된다. 그는 앞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세상에 노출되지 않고 자연이 훼손되지 않은 원시림에 가까운 1982년도의 스카겐은 내 마음속에 깊이 간직되어 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때의 풍광을 관광객들은 알 수 없을 것이다. 문명의 발달과 세월의 흐름에 모든 것이 변모되고 있지만, 그때 자연 속에 살던 화가들의 작품들은 영원히 스카겐을 지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