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작열하는 산 지미냐노
불타는 황금빛 태양은 지고 어스름한 저녁노을이 깔릴 무렵, 도착한 곳은 이탈리아의 몬테카티니.
크리스마스도 아닌데 거리에는 5m 간격으로 왕관 모양에 꽃을 두른 네온사인이 여기저기 빨랫줄처럼 걸려있다. 양옆 가로수에서도 형형색색 컬러의 불빛이 번쩍이며 도시는 밤을 지새우고 있다. 바로 미스 이탈리아를 뽑는 날이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이탈리아 가수들 노랫소리가 들리니 덩달아 축제 분위기에 휩쓸렸다.
호텔에 도착했다. 가장 오래된 건물로 이탈리아를 느낄 수 있는 분위기였다. 입구의 고풍스러운 카펫과 모서리마다 장식된 고가구들을 보고 “와, 이탈리아에 왔구나!” 하고 찬사를 보내고 식당에 들어갔다.
친퀘테레에서 점심을 과하게 먹은 탓인지 모두 시큰둥해지고 있는데 잘생기고 노련한 웨이터 아저씨가 한 접시 가득 전채요리를 담아주었다. 다름 아닌 굵은 고무줄 같은 마카로니이다. 따끈한 김치찌개가 그리운 판에 서로들 쳐다만 보고 있는데 한참을 들여다보던 친구가 입을 열었다.
“마카로니가 한 접시에 42개나 있어 너무 많지 않니?”
모두 폭소가 터졌다. “나는 43개!” “나는 41개!” 모두들 남길 수밖에 없었다. 다시 포크 스테이크가 나왔으나 먹지 못하고 남겼다. 이번엔 유리그릇에 서양 배를 포함한 과일들이 통째로 나왔다. 무딘 칼로 깎느라고 힘은 들었어도 모두 반가워했고 꿀맛 같았다.
알프스의 낮은 산자락을 톱니 기차로 서서히 올라가듯, 한여름 산등성이를 버스 타고 빙글빙글 돌아 올라갔다. 좁은 길옆에는 앙증스레 매달려 영글어 가고 있는 포도송이들이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라 카스텔리나 와이너리에 도착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인기 있는 포도주라고 하니 더욱 귀가 솔깃해진다.
자연이 선물한 불타는 태양과 한없이 마실 수 있는 신선한 공기,
비옥한 옥토가 이곳을 포도주 왕국으로 만들었나 보다.
어둑어둑한 지하창고에 호스 하나 겨우 들어갈 구멍만 있는 큰 참나무통 수십 개가 보관되어 있었다. 자연이 선물한 불타는 태양과 한없이 마실 수 있는 신선한 공기, 비옥한 옥토가 이곳을 포도주 왕국으로 만들었나 보다. 3개의 잔을 앞에 놓고 태양의 일조량과 포도의 수확한 시기, 숙성된 시간 등을 논하며 포도주를 음미하니 꽤 포도주를 즐기는 품격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붉은 포도주의 비밀은 포도의 껍질에 있다. 포도껍질은 색소와 함께 떫은맛을 지닌 ‘타닌’ 성분을 함유하여 포도즙이 포도 껍질과 함께 발효하면 와인에 붉은 자줏빛과 떫은맛을 부여한다. 백포도주는 발효를 시작하기 전에 즙과 껍질을 분리한다. 백포도주는 과일의 신선함과 섬세함을 보존하는데 중점을 둔다. 로제와인은 과일 맛이 나고 신선하다.
포도를 껍질과 함께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둠으로써 약간의 색깔이 배어 나오도록 한다, 숙성 초기에 마시는 것이 좋다. 스위트와인은 당분이 아주 높은 포도로 만든다. 포도의 함량이 아주 높은 시기에 수확해서 만든다. 포도를 말려서 당분을 농축시킨 뒤 만든다.
얼려서 당분을 달콤한 즙과 분리해 만든 디저트와인도 있다. 아이스바인(ice wine)은 눈이 왔을 때 수확한 포도로 당도가 가장 높아 디저트로 마시며 여성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다. 특히 독일산은 생산량이 많지 않아 가격도 비싸다. 늦가을 서리가 와서 포도가 꼬들꼬들할 때 수확한 포도로 담근 포도주는 독일어로 ‘스페트레제(spatlese)’이며 단맛도 있고 상큼하다. 보통 수확한 시기에 따라 와인의 이름이 달라진다.
잊을 수 없는 와인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다. 1983년도에 독일서 귀국할 때 독일 의사가 귀한 포도주라고 아이스바인을 선물했다. 그 당시 아이스바인 1병 값이 100마르크 정도나 되고 귀한 술이라 하여 무심코 장롱 속에 보관하고 나서 잊어버렸다. 어느 날 기억이 나서 먹으려고 땄는데 이건 식초도 아니고, 이상한 술이 되어 결국 버렸다. 와인에 대한 지식이 없어 와인은 보관온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요즘은 수많은 종류의 포도주가 각국에서 수입되고 식사 때마다 한잔의 붉은 향기를 음미하고 축하 행사마다 으레 와인으로 건배한다. 참으로 좋은 시절이 되었다. 우리는 싱싱한 청포도를 한 주먹씩 들고 따 먹으며 카스텔리나의 예쁜 가게를 감상하였다.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초입부터 중세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토스카나 주의 대표적인 역사 도시 산 지미냐노를 찾았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도시이다. 에르사 강 계곡 높은 곳에 있어 도저히 자동차로 들어갈 수 없고 수십 대의 버스가 모여 있는 장소에 내려 걷기
시작하였다. 성벽이 쌓인 돌담 위에서 내려다보았지만, 도시의 구조가 3층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13세기 시가지로 가기 위해 성문을 통과하였다. 얼룩무늬 나무를 짜 맞추듯 돌로 된 바닥은 지그재그 모양으로 예쁘게 정돈되어 감탄이 절로 나왔다. 중세에 이러한 길바닥을 이토록 예술적으로 정비하다니 놀라웠다. 길 양옆에는 어느 관광지보다 독특한 골동품들이 쌓여있었다. 주로 중세의 시대상을 말해 주는 모조품들이다.
좁은 길에 관광객들이 붐비고 한참을 걸어 들어가니 치스테르나 제1의 광장이 나온다. 중앙에는 이 광장의 이름이 유래된 우물이 있다. 중세의 광장이라 하여 기대를 하였지만 별로 크지 않고 수비니어 가게로 둘러싸인 오밀조밀한 광장이었다.
행운을 빌며 던진 각 나라의 수많은 동전이 모여 있지만, 정작 볼 것은 없어 조금 실망하였다. 사람들이 줄을 서있는 가게가 있어 물었더니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아이스크림 대회에서 챔피언이 된 ‘젤라토리아’라는 가게란다. 친구와 함께 긴 줄을 견디면서 시원 달콤한 아이스크림으로 타는 목을 적시니 이 어찌 또 하나의 멋진 체험이 아니겠는가.
1,000년의 세월을 거치고도 중세의 건물들은 거의 손상을 받지 않은 듯하다. 빛바랜 붉은 벽돌 건축물들이 작열하는 이탈리아 태양 아래 제2의 듀오모 광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성당 돌계단에 앉아 현재 시 청사로 사용되고 있는 포폴로 궁의 창살 없는 창문을 바라보니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을 속삭이던 고성이 연상된다.
높이 54m의 그로사탑은 한 명이 겨우 걸어 올라갈 수 있는 좁은 계단으로 되어있다. 무릎이 아프고 지쳐 아무도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유럽 성당의 내부 벽화는 모두가 환상적인 그림과 성경의 이야기로 되어있어 이해하기 수월하다. 피사드 성당 내부에는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회반죽으로 먼저 칠한 다음 젖어있는 상태에서 곱게 벽화를 그리는 화법이란다. 운치 있어 보였다.
중세라면 창과 칼로 무장한 기사들을 먼저 떠올리기 쉽지만 세계인들이 아끼고 즐길 수 있는 중세의 문화가 유일하게 잘 보존된 이 도시는 인류의 유산임에 틀림없다.
